한조부락에서
전임 한조부락장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바야흐로 푸근한 가을 냄새가 온 천지를 뒤덮고 하늘은 드높았다. 새로운 부락장을 뽑는 선거기간이 다가오자 마을은 축제분위기에 휩싸여 저마다 다음 부락장은 더욱 마을을 위해 열심히 일할 사람을 뽑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지하는 후보를 상징하는 색의 옷을 맞춰 입기도 하고 풍선을 날리기도 했다. 아이를 무등태우고 사진을 찍는 후보도 있었고 가난한 시장노인의 손을 잡고 눈물콧물 찍다 못해 연탄가루를 찍어 바르는 후보도 있었다. 이제 한창 축제는 절정에 이르렀다.
오래전 가난해서 다른 부락의 도움을 받아야했던 한조부락은 빠른 경제성장뿐만 아니라 다른 부락들은 백여 년에 걸쳐 이룩한 민주주의를 단 50년 만에 이룩한 쾌거를 바탕으로 자신감이 팽배해 있었다. 활기 넘치는 한조 부락은 다른 부락의 견제와 시기를 받았지만 그렇다고 한조부락민 모두가 어깨를 겯고 나란히 걸음을 옮기는 부락이 된 것은 아니었다. 한조부락은 윗부락인 조인부락과 아랫부락인 한조부락으로 나뉘어져 있다. 애초에는 하나였었는데 온 천지가 싸우던 와중에 끼어 새우등 터지듯 둘로 나뉘고 난 후 부락민들은 왜 싸워야하는지도 모른 체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각각의 부락 유지들 말을 받들어 서로를 끔찍하게 죽이고는 다시는 상종 못할 원수사이가 되고 말았다.
한조부락은 밥 대신 허리띠를 졸라매어 공복감을 다스리며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이웃의 다른 부락과 비슷한 경쟁력을 갖추었지만 조인부락은 가난을 면치 못했다. 한조부락민들은 평화로운 중에도 원수가 된 조인부락이 어쩌면 한조부락을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항상 갖고 있었다. 한 때는 조인부락 사람들이 한조부락 구석구석에 숨어 활약하고 있다는 망상에 시달리기도 했다. 때로는 간첩이라거나 뻘겋다는 말로 어지러운 사회가 정리 되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은 조금도 흐트러진 데나 어지러운 데 없이 정연하였다.
뻘건 것은 조인 부락의 상징 색이었다. 사람들은 뻘건 색에 민감하게 반응을 했고 부락장은 뻘건 색은 세상에서 지워야한다고 가르쳤다. 뻘건 것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아 제 형제자매도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 마귀라고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나이든 어른들 중 몇몇은 지금도 뻘건 것을 생각하면 길을 가다가도 움찔움찔 놀랄 지경이었다. 그래도 어른들은 부락의 유지들이 가르치는 대로 이를 악물고 열심히 일하였고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워냈다. 거리는 활기로 넘쳤고 한조부락의 미래는 밝아보였다.
노을 씨는 오늘 부락 유지이며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꾼인 방선 씨를 만나기로 했다. 긴히 할 말이 있으니 가까운 부락민들을 최대한 많이 데리고 오라고 했다. 그러면 따로 상을 주겠노라고 해서 노을 씨는 아는 사람마다 연락을 해서 자그마치 20명이나 모을 수 있었다. 약속장소에는 방선 씨를 대신해서 방선 씨 집에서 일하는 제갑 씨와 길동 씨가 나와 있었다. 오종종한 얼굴의 제갑 씨는 허연 머리카락을 염색도 하지 않고 연신 입을 씰룩거리며 옆에 앉은 길동 씨에게 흥분하여 떠들고 있었다. 보타이를 맨 길동 씨는 품위 있게 앉아 고개를 끄덕이며 제갑 씨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노을 씨와 노을 씨가 데려간 사람들이 맞은 편 자리에 주루룩 앉았다.
"이게 뭡니까?"
노을 씨가 사람들을 소개하기도 전에 길동 씨가 다짜고짜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 듯 한마디 내질렀다. 그 바람에 제갑 씨가 하던 말을 멈추고 길동 씨 얼굴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윗부락이 핵실험을 감행하며 한조의 생존마저 위협하는 이런 때에 지못미들은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꾸미고 있느냔 말입니다. 무례한 자는 마땅히 국회에서 추방되고 사법기간이 중형에 처해야 옳은 것 아닙니까. 나라의 꼴이 이게 뭡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노을 씨는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 왠지 죄스러워서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한조부락이 체통을 지키고 계속 살림을 꾸려나가려면 기강을 세워야만 합니다. 어느 후보가 옳은지 방송사들은 왜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겁니까? 대학도 안 나온 자가 어찌 정치를 알아서 부락장이 되겠다는 겁니까?"
아마 길동 씨는 최근의 선거 바람을 분석한 결과 길동 씨가 지지하는 창걸 씨가 위태로워지자 분이 난 것 같았다. 노을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창걸 씨는 배운 게 많고 사람을 재판하던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고등학교 밖에 못 나온 사람과 싸우다니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이기는 하다고 노을 씨 옆에 앉아 있던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패인 사람이 속살거렸다. 아무래도 부락을 이끌려면 배운 게 많은 사람이어야한다는 말에 노을 씨도 노을 씨 옆에 앉은 사람들도 동감했다. 노을 씨는 오래전부터 길동 씨의 명성을 익히 들어 그가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한 때는 부락대표도 역임했었던 사람이고 한조부락의 유명한 대학 교수이기도 하니 노을 씨는 감히 길동 씨의 말에 대꾸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저 그의 말을 귀에 새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말끝마다 이게 뭡니까며 콧수염을 베베 꼬았다. 옆에 있던 제갑 씨가 말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길동 씨가 입을 달싹이기 전에 상체를 앞으로 쑥 내밀며 이야기 주도권을 가져갔다.
"이대로 가면 한조가 망합니다. 안 그래도 이념적 갈등으로 혼란을 빚어온 우리 사회가 이번 선거로 인해 엄청난 혼란을 가져올 것이 우려됩니다. 불순 세력들이 이것을 기회로 체제를 전복하려 들지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 부락이 어찌되는지 불을 보듯 뻔하지 않습니까? 막아야합니다 우리 부락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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